2010년 8월 25일 수요일

악마를 보았다 (I saw devil, 2010)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동네에 새로운 꼬치집이 생겼다. 그 곳에는 달콤한 맛, 매운 맛, 그리고 폭탄맛이 있었는데. 그 이름도 살벌한 폭탄맛은 "그저 맵기만 한 맛"이었다. 주변의 고등학생들은 폭탄맛에 열광했다. 왜? 그것은 일종의 호기를 부리기에 적당했으니까. 난 이걸 먹고도 물을 먹거나 눈물을 흘리지 않아. 하면서 부은 혀를 헥헥 거리며 폭탄맛을 일부러 꾸역꾸역 먹기도 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폭탄맛을 많이들 먹기는 하지만 결국 학생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달콤한 맛과 매콤한 맛을 즐겨더랬다.
이 영화, 한마디로 폭탄맛 같다.

잔인함이라는 면에서 보았을 때, 우리가 "아 이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 하는 수위가 있을게다. 나는 개인적으로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이나 <킬빌>은 참을 만했지만 (사실은 열광했지만!!) 박찬욱의 이나 <복수는 나의것>은 조금 버거웠다. 역시나 이 영화는 상영 내내 불편했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견디기 힘들 정도로 버거웠다. 특히, 극 중에서 강간을 당하거나 죽어나가는 여성들을 나의 자매나 친구들로, 그리고 나는 수현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보니, 이병헌이 연기해낸 수현은 절박하고 처절하고 냉정하고 차갑다기 보다는 당장이라도 깨져버릴 것 같은 살얼음이었다. 몇 몇 장면, 칼로 아킬레스 건을 긋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거나, 작두로 나체의 여자의 머리를 잘라내는 것, 은 마치 관객들의 말초신경을 태워버리고 말겠노라는 감독의 일종의 "변태적인", 폭탄맛스러운 소스같았다. 즉, 우리가 폭탄맛을 시도는 해보지만, 결코 좋아할 수는 없는 것처럼, 이 영화는 분명히 대중에게는 크게 어필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아니, 상영 2주차 관객이 급감한 것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매력이 있다. 마치 고어포르노물을 연상시키는 장면들이나, 특히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과 비견되는 것을 보면 감독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성공이다. 가끔씩 보여지는, 혹은 느껴지는 몇 몇 감독들에 대한 오마주는 핏빛으로 현현히 빛나고 있다.
그리고 배우들의 얘기를 빼 놓을 수가 없는데, 최민식은 한마디로 "미쳤다."
감히 <추격자>의 하정우가 같은 살인마역으로 최민식과 비교되고는 하는데, 하정우는 "살인마 역을 연기한 배우" 였다면, 최민식은 "그냥 사이코 살인마" 였다. 그의 축축하게 불타는 듯한 불쾌할 정도로 강렬한 눈빛은 아쉽게도 이병헌을 압도한다. 원래의 이병헌 캐스팅이 한석규였음을 생각하면, 차라리 그 편이 이 영화의 컨셉이었던 "대결"이라는 점에서는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다. 이처럼 최민식은 영화내내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면서, <실종>의 문성근이 보여줬던 그것에 최민식의 솜씨를 더했다. 결과물은 축축히 눅은 쿠키를 먹는 듯한, 그런데 그나마도 상해버린 그 쿠키를 꾸역꾸역 삼키는 견딜수 없을 정도의 "더러운" 연기를 보여준다.
이병헌 역시 영화내내 본인의 솜씨를 발휘한다. 진짜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느끼는지 절대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종종 눈빛에 슬쩍 비치는 그 차가운 광기는 관객들과 감독이 원하던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마치 자신도 자신을 어쩔 수 없다는 그 잔인한 핑계는 영화 엔딩에서 무너져 버린다. 악마만 남아버린 그 자리에는 얼굴이 일그러지는,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가 가까스로 견뎌내던, 그저 가시 면류관을 쓴 구원자만 남아있다.

책이었던가 영화였던가 이런 구절이 생각난다.
"괴물을 잡으러 갈 때는 그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영화 속에서 유치하게 누가 악마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악마를 본 주체가 최민식(장경철)이었는지 이병헌(김수현)이였는지, 아니면 관객이나 평론가 였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악마를 보여주고 느끼기엔 그것은 너무 일차원적으로 잔인했고, 악마의 근원에 대해서 통찰하는 과정은 너무 짧았다. 피로 물들었던 속도감 넘치는 1시간 반을, 나머지 30분의 사색으로 감추기엔 영화는 너무 색깔이 분명했다. 그래서 조금은 아쉽다.
우리는 사실 악마를 "제대로" 보진 못했다.

2010년 6월 6일 일요일

장화, 홍련 (A tales of two sisters, 2003)


쌍화점 (A Frozen flower, 2008)


아... 쩔어!! 아마도 한국영화 역사상 아직도 가장 야한 영화가 아닐까 싶다. 또 당시의 뉴스를 찾아보니 송지효가 헤어누드까지 한다는 루머가 있었던 듯 하다. 에로틱한 강렬함에 있어서는 그래도 괜찮았을 법한 영화다.
욕정이 넘실거린다. 뒤이어 육체도 넘실거린다. 마치 더이상 못 이기겠다는 듯이 서로를 감싸안는다. 비열한 손이나 눈빛이 아니다. 그저 원초적인, 서로를 가져야만 하겠다는 그런 "고픔"이다. 평생 왕의 꼳츄맛만 보던 홍림은 그녀의 버진에서 새로운 쾌락을 느꼈을지도. 어쩌면 사랑이 아니라 그저 "하고싶다"로 보였던 것은 그 이유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어설프다. 그래서 이 영화가 아쉬운 이유이다. 어설픈 사랑이느니 "난 널 죽도록 갖고싶어" 라는 애욕이 더 강렬하다. 몸 섞다 보면 마음도 섞이기 마련.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여전히 널 죽도록 갖고 싶어라는 마음이 더 크게 보여졌더라면 영화는 명불허전이 되었을텐데.
송지효는 무겁다. 눈빛도 목소리도 가라앉는다. 그래서 더 진중하다. 그녀가 그 "어설픈 사랑"에 지쳐보이는 이유는, 그녀의 애욕은 인물에 비해 가볍기 때문이다. 날이 어둡다. 자시가 되었다 보다. 옷은 벗겨지고 서로를 애무하며 몸은 반응한다. 사실 이 영화가 싫으면서도 "좋은" 이유는 이렇게 과감하다. 젠체하지 않는다. 노출도 표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쩌면 앞으로의 몇 년 후에 여배우의 노출에 관한 패러다임은 바뀔 것이다. 그저 신체부위일 따름인, 가슴에 엉덩이에 굳이 큰 의미부여를 할 필요는 없다. 대신 그 장면이, 그 흐름이 정말로 "갖고싶은-욕망" 이었는지가 중요하다.
송지효는 극 중에서 홍림을 원한다. 사랑인지 욕정인지 따지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리고 불나방 처럼 그 불에 몸을 던진다. 결국 그녀에게 남은 것은 없지만, 아마도 그녀는 이후에 잘 살았을게다. 왕후는 용감했고, 누구보다 진중했으며, 누구보다 솔직했다.
이 것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달콤한 인생 (A bittersweet life, 2005)

이 영화 고급스러운 프리미엄 와인인 척 하지만 사실은 그저 찍어낸 비루한 기획상품같다. 한국제목과는 달리 영제목이 달콤하면서 씁쓸한 인생이다. 무엇을 얘기하고 싶었던 걸까

"나한테 왜 그랬어요?" 묻는다. 사실은 자신에게 하고 싶은 질문일지도. 결국 죽음으로 다가간다. 흔들리는 나무를 보며 쓸쓸히 읊조리던 독백처럼, 사실 흔들렸던 것은 남자의 마음뿐인데.

이병헌의 눈빛은 쓸쓸하지 않다. 그러나 깊다. 깊어서 속내를 읽어낼 수 없을 만큼, 진중하고 고요하다. 그런 그의 눈빛이 흔들리는 순간은, 그의 뒷모습이 흔들리는 것은 그녀의 첼로때문이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는데, 그는 그녀의 연주를 듣는 장면이다. 눈빛은 없지만 단단히 굳어진 어깨는 그녀의 소리에 무너져버린다. 보리수가 흔들리던 그 모습처럼, 그는 흔들린다. 가벼운 흔들림이라기 보다는 아쉬운 흔들림에 가깝다.


다시 처음 얘기로 돌아가서 영화는 고급스럽다. 그런데 조금만 수가 틀리면 폐 시장에서 묶여서 물 세례를 받는다. 진흙에 파묻히고 축축한 복수심만 남는다. 젠체하지만 사실은 속은 비틀어져있다. 달콤 씁쓸하다고? 와인인 줄 알고 마셨는데 칡즙이 넘어온다. 써서 뱉고 싶지만 그저 삼키는 수밖에. 질끈 감고 그냥 버텨내면 또 흔들림이다. 유난히 화장실 거울에 비친 피를 씻어내는 남자의 눈빛이 막막한 이유는 아직도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사람들은 모두 흔들린다.
보스도, 남자도, 여자도, 심지어 백사장도...
그 미묘한 떨림은 큰 파동이 되어서 모두들 자신에게 질문한다.

"나한테 왜 그랬어요..?"

범죄의 재구성 (The big swindle, 2004)


coming soon

타짜 (The war of flower, 2006)

패가 돌아간다. 선은 정해졌다. 손은 눈보다 빠르다는 영화의 카피처럼, 영화는 쉴 새 없이 몰아친다. 그러나 관객은 지치지 않는다. 왜냐고?
최동훈이니까.

극 중 인물은 많지만 절대 과하지 않다. 고니도 정마담도 아귀도 고광렬도, 심지어 고광렬의 여자친구까지.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모두가 기억나는 이유는 영화 자체가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마치 화투패의 뒷면 처럼 자극적이고 강렬하다.

그러나 나의 포인트는 역시 정마담이다. 김혜수는 여기서 너무 아름답다. 아름다운 칼이란다. 전체를 조각해서 보석을 새겨넣은 천박한 칼이다. 그녀는 사람들을 베는 것에 익숙하다. 그런 그녀에게 동정이 가는 이유는 그녀는 쓸쓸하기 때문이다. 극도로 예민하지만, 외로운 사람이다. 명품을 걸쳐입은 그 외양은 화려해보이지만, "먹고 살기 힘들만큼" 그녀는 자신이 팍팍하다. 어쩌면 그녀가 "평경장"을 죽여서라도 정말로 갖고 싶던 것은 어떤 비루한 욕망이라기 보다, 그녀 자신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나를 이 길로 들였어." 속고 속이고, 그러나 패는 돌아가고. 손도 눈도 입도 쉴 틈이 없는, 사람들을 판떼기에 앉혀서 그 끝까지 끊어먹고야 마는, 가장 원초적이고 천박하다. 어쩌면 "이대를 다니던" 그녀는 여느 대학생들처럼 풋풋했을 지도. 그녀를 잃어버린 순간, 그녀는 가장 끔찍하게 인생 자체를 강간당했고, 되갚아준다. 되갚아 준다해도 돌아오는 것은 없다. 이미 시간이란 바퀴는 꽤 많은 것을 감았고 다시 풀기엔, 다시 자르기엔 그녀에게 너무 아까웠을지도.
외롭지만 결국 끊어내지 못하는 그녀의 눈은 처량하다. 아름다운 칼이지만 속으로는 녹슬어 있다.

패는 돌아간다. 누구는 승자가 된다. 나머지는 패자가 된다. 누구는 광박을 썼고, 누구는 피박이란다. (물론 영화에서는 섯다를 친다)
사실은 지긋지긋한 청춘도 도박판 아니던가.
"그래도" 전이 많은 사람은 게임을 계속 이어가고, 끊임없이 패는 돌아가지만, 자신을 소모한다. 대박은 오기도 하지만 쪽박도 온다. 가끔은 배짱있는 선택도, 가끔은 비열한 사람에게 당하기도. 그래도 나라면 이 도박판에서 이렇게 뻔한 답을 하겠다.
"못먹어도 고!"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Untold Scandal, 2003)


워낙에 좋아하는 영화인터라 지금도 사람들의 리뷰든지 지나간 뉴스들을 다 챙겨 본 영화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한 블로거의 리뷰, 마지막 이었다.

"조원과 숙부인은 툭-하고 떨어지면서 이승에서 저승으로 간다. 하지만 이번에 숙부인은 사랑의 징표인 자신의 빨간 목도리를 챙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는 우리가 부부라한들 - 굳이 징표가 없다 한들- 뭐라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기에.."

전에 얘기했던 것 처럼, 이 영화는 정극을 바탕으로 하고 코미디를 더했다. 에로틱한 코미디라니. 그러나 천박하지 않다. 모두들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듯 달려들지만 그것은 공격적이라기 보다 낭만적이고 우아하다. 그 몸짓 하나하나가 더 애틋하게 혹은 코믹하게 보이는 이유는 극 중의 모든 인물은 진지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것의 원작이 프랑스의 소설 피에르 쇼데를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이라는 것은 놀라울 따름이다. 살롱 문화와 규방 문화의 적절한 매치, 위험한 유혹과 탐닉이라는 주제는 한국적으로, 누구보다 더 한국적으로 얽혀든다. 그들이 숨막히는 코르셋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지치는 유혹의 게임을 벌였다면, <스캔들>은 넉넉한 한복자락 처럼 완급조절에 능하다. 유혹의 긴장감, 쾌락의 즐거움, 그에 대한 애틋한 마음까지 김대우는 능수능란하게 외국의 한 켠을 한국에 옮겨놓는다. 봉숭아 물이 끝내 새끼 손톱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숙부인의 마지막이 아직도 절절하게 남는 이유는 이 때문일지 모른다.


그리고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미술과 음악이 아닐까 싶다. 정구호와 이병우. 명불허전이다. 당시 뉴스 기사로 보면 순수제작비만 50억원, 미술에만 20~30억원만 투자되었다고 하는데 정구호는 돈에 아깝지 않은 미술을 보여준다. 사치와 향락이 가장 심했다는 19세기의 조선 말, 그 곳은 여느 살롱보다 더욱 우아하고 기품이 있다. 그녀의 비녀, 화장품, 향수 그리고 문지방 하나까지도 아름다우니 굳이 명소(내소사)까지 가지 않더라도 장면은 하나의 화폭이 된다. 화폭이 되어서 가슴까지 저려오는 아름다움이 흘러넘친다.
이병우 역시 음악으로 영화 전체를 조율한다. 바로크 시대를 연상하게 하는 음악을 하고 싶다던데, 우리가 많이 착각하는 부분-우리의 것이 가장 한국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과감하게 뛰어넘은 점이 좋다. 한마디로 모던하다. 아니 ko-dern하다. (Korean-modernism) 과감하지만 과하지 않고, 애틋하지만 슬프진 않다. 딱 한국적인 느낌이다.

영화는 비극적이다. 아름다운 비극이다. 결국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떠난다. 하지만 마음은 그 곳에 두고 간다. 그것이 설령 위험한 게임에서 비롯한 마음이었는지, 단순히 사회에 갇혀서 조그만 일탈이었을 지라도. 그들의 마음은 그림이 되어, 빨간 목도리가 되어, 그리고 꽃잎이 되어 슬픔 속에 떠다닌다. 영화의 마지막 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그런" 낭만스러운 슬픔이 아닐 수 없다.

방자전 (The Servent, 2010)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몽룡은 춘향에게 비열한 손으로 음험하게 묻는다.
"우리 가짜 미담 한번 만들어보지 않을래?"
춘향은 방자의 손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얘기한다.
"우리 둘이 만나봐야 똑같잖아."

김대우는 내가 좋아하는, 가장 미묘하고 야한 대사를 쓸 줄 아는 작가이다. 소위 "대사 빨" 이라는 것이다. "대사 빨"이 "연기 빨"을 만나면 괜찮은 작품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살인의 추억>이 그랬고 (박은교와 송강호), <연애의 목적>이 그랬다. (고윤희와 강혜정) 그런데 이 영화 대사 빨은 좋은데 연기 빨이 조금 약한 듯 하다.

같은 작가의 작품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는 달랐다. 스캔들은 정극에 재치있는 대사를 더했다면, 방자전은 재치있는 대사에 억지로 정극을 끼워맞추려고 한다. 내내 코미디인지도 정극인지도 종잡지 못하고 있다가 영화의 막바지, 정극을 빙자한 "가짜 미담"을 만들어낸다. 억지 춘향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슬프지도 않다.
어쩌면 퓨전사극의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김치피자를 먹는듯한 느낌이다. "어색하긴 하지만 -생각보다- 맛있어." 이하 동문이다.

아마도 우리가 이 정극에 충분히 몰입하지 못하는 까닭은 배우들의 "연기빨"을 탓할 수 밖에 없다. 스캔들의 전도연과 배용준, 이미숙이 진지하다. 시종일관 그 표정은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났다. (후에 리뷰에 적어야 겠다.) 그러나 방자전의 조여정, 김주혁, 류승범은 사뭇 진지하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하다. 억지로 웃음을 참고 진지한 로맨스 얘기를 하려고 하니 한참을 어색하다.

또 "조연의 문제"이다. 오달수와 송새벽. 발견이다. 영화 내내 당신은 그들 때문에 웃을 수 있다.
그런데 웃음이 너무 과하다. 균형이 깨져버린다. 한참을 코미디로 돌아간 방자전의 화살표는 다시 로맨스로 돌아오기가 쉽지않다. 억지로 화살표를 꺾으려니 부러져 버린다. 코미디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내가 원하던 것은 은은한 코미디와 에로티시즘이었다.

재밌기는 하지만 아쉽다. 김대우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 하나지만 감독으로서는 끌리지 않는다. 좀 더 섬세하고 미묘한 에로티시즘. 김대우는 한 우물을 판다. 좋지 아니한가. 대사만큼이나 영화가 더 좋았더라면, 연기의 균형이 더 맞았더라면... 수많은 "가정법"이 붙는 영화다.

2010년 5월 14일 금요일

하녀 (The housemaid, 2010)


낚였다!!!
이 영화는 스릴 넘치지도 않고 심지어 섹시하지도 않다. 그냥 지가 팜므파탈인 줄 아는 (심지어 그 뜻 조차 제대로 모르면서) 눈화장을 짙게한 동네 술집의 걸레같은 여자애애 불과하다!!!
정말 너무 화가 나는 이유는 감독이 영화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든지 간에 (무산계급과 유산계급을 굳이 욕조 닦는 하녀를 통해 얘기하지 않아도 된다. 차라리 지붕뚫고 하이킥!이 더 섹시하고 슬프다.), 전도연을 그냥 저런 백치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실, 영화가 슬슬 공개될 무렵 나의 오만가지 상상을 자극한 것은 전도연이었다. 아.. 전도연! 그래 그 전도연! 전도연이라면 순수한 척을 하며 주인 남자를 꼬시는, 욕조를 닦으면서도 주인 남자를 욕조 안으로 끌어들일 것 같은 그런 섹시한 매력이 있지 않은가.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 근데 이게 뭐야. 벗어. 네. 빨어. 네. (거대한 스포일링이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지루하다.
메인 캐릭터인 전도연의 유혹이 없어진 대신에 이정재의 유혹이 나온다. 유혹이라고? 택도 없는 소리. 그냥 돈많은 졸부가 창녀 (비슷한) 여자를 꼬시고 돈 몇푼으로 이거면 됐지? 유혹의 그 은밀한 섹시함도, 긴장감도 없으니 영화는 여름날 소 불알 마냥 축축 늘어진다. 차라리 여름날 바다에서 조인해서 "섹스를 하느냐 마느냐" 밀고 당기는 그들의 적잖이 저렴한 하룻밤사랑이 더 섹시할 지경이다. 물론 연기도 좋았고, 감독의 해석에 따른다면 굉장한 풍자극이다. 하물며 깐느 갈라스크리닝 이후 오페라 라는 평을 받았다하니 감개무량하다.
그러나 "유혹"이라는 어마어마어마어마어마한 (내가 제일 좋아하는 키워드가 아닐 수 없다.) 아이템을 이렇게 무르게 놔뒀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끔찍하다. 앞서 리뷰한 <시>와는 다른 의미의 끔찍하다이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이렇게 섹시해 질 수 있었던 영화가 단순히 "섹스한" 영화 밖에 되지 않았다. 영화가 너무 쿨했던 모양이다. 조금은 새침했더라면, 조금은 미묘했더라면 그 풍자극이 더 감미로운 요리가 되었을텐데, 이것은 그냥 짜고 매운 삭은 젓갈같은 느낌이다. 아직도 이 영화가 너무 화가 난다.
P.s. 난 윤여정을 사랑한다. 그녀의 그 음색이 좋다. <그 때 그사람들>의 그 음색이 자꾸 떠올라서 더 좋다. 이정재는 글쎄. 운동을 열심히 한 것 같다. 서우는 가끔 나오는 연기가 좋다. 딱 집에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절대 엔딩의 노래 부르는 장면은 아니다. 이 영화를 욕하기엔 내가 아는 욕이 너무 적은 듯한 느낌이다.

시 (Poetry,2010)


시를 써본 사람은, 혹은 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알다시피 시의 특별함이라고 한다면, 그리 길지 않은 몇 글자 안에 시인의 감정이, 세상의 몇 몇 일들이 폭발할 듯 응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장이라도 부스러질 것 같은 외로움 일 수도 있고, 뜨겁고 열렬한 사랑이기도 하다. 때로는 활자 위로 극적인 슬픔을 한껏 흘리지만 종종 날카로운 유머가 되어 무언가를 비꼬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 굉장히 끔직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의 인생과 세상의 모든 삶에게 강간당하는 기분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가빠진 숨을 부여잡을 수 없는 것은, 마음이 지칠 정도로 그 불편하게 온전한 아픔을 떨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영화를 관통하는. 영화의 마지막 미자(윤정희)의 시 "아네스의 노래" 에 담긴 감정 때문일게다. A4용지 한장이나 겨우 채울 그 시 위로 우리는 2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벗겨내던, 미자가 경험한 모든 감정이 흘러넘치기 때문이다.
강렬함이나 파격이라는 닳고 닳은 수식 대신에, 감독은 그저 흐르는 강물과 불편하게 그 위로 넘실거리는 햇빛을 담아낸다. 영화의 처음 퉁퉁 불은 모습으로 강물에 얼굴을 쳐박던 소녀 대신에 그저 그녀의 목소리로 추정되는 그것을 스크린에 흘려보낸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영화를 닫아버린다. 가슴이 아프다. 지랄맞은 아픔...
더 좋았던 것은 영화 중간 중간 나오던 시다. 조영혜의 시. 부석사의 눈물이던가. 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 였던가. 시 때문이었던가. 만질 수 없는 매마른 감정들이 공기 중에 부유한다. 미자의 눈빛은 그것을 좇고 관객은 그것을 지켜본다. 아니, 나중에 허공에 손을 뻗고 있던 것은 내가 아닐까 싶다. 시를 쓴다는 것은 그런 것일까. "누구나 마음 속에 시를 품고 있다는 것 처럼" 주인공을 따라 한껏 품었던 그 시를, 영화가 끝난 후 날숨으로 뱉어낸다. 영화관은 시로 가득찬다.
가끔 영화는 너무 말이 많다. 소설은 너무 길다. 음악은 너무 화려하며, 미술은 거만하다. 그러나 시는 겸손하며, 조신하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눈을 내리깐다. 그래서 더 궁금하다. 억만가지 복잡미묘한 감정은 떨군 눈꺼풀 위에 매달려 있는 듯하다. 이 영화는 감히 명작이다.
P.s. 영화가 끝난 후 이 영화가 너무 자랑스러웠다. 내가 다 가슴이 벅차서 당장이라도 갈라 스크리닝이 되는 것을 상상했다. 거만한 그들이 이 영화 앞에서 예의상의 기립박수가 아닌 가슴이 조여옴을 느꼈으면 좋겠다. 감히 황금종려상을 받으면 기사를 보며 내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박쥐 (Thirst, 2009)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이 영화가 개봉할 당시 나는 약간 지루한 삶을 살고 있었다. 대학 1년간 해보고 싶었던 것을 다 해봤으니, 조금은 "남들 하는 것"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도서관에서 이 영화의 예고편이나 홍보자료를 보는 것이 나에겐 큰 힘이었다.
영화가 개봉했다. 4월 27일 정도였던 것 같다. 학교를 빠졌다. 처음으로 출석 100%를 할 수 있었는데, 도무지 수업이 끝나고는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CGV압구정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영화를 기다리는 씨네 드 쉐프의 테이블 위에서 나는 조금의 죄책감으로 책을 펴놓고 있었다. 눈에 들어올 리 없다. 박쥐의 홍보자료를 탐미했다. 한 자 한 자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제 읽었던 영화잡지의 박쥐의 내용이 또 떠오르는 듯 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움질거렸다. 어깨가 들썩였다. 눈 끝이 떨려왔지만 절대 눈을 감지 않았다. 이번엔 욕망이 넘쳐 흐르는 스크린 위를 탐미하고 있었다. 단 한 장면도, 단 한 줌의 소리도 놓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사실 이 영화를 보면서 아쉽게도 상현(송강호)의 고뇌는 눈에 차지 않았다. 자신을 희생하던 "성스러운" 신부가 남의 피와 친구 부인의 육체를 탐하는 "성스러운" 뱀파이어가 되었다니. 송강호는 복잡한 캐릭터를 잘 풀어나갔지만 썩 와닿지는 않았다. 솔직히 나의 시선과 마음은 이미 한 사람이 뺏어 갔으니깐.
김옥빈은 사실 굉장한 연기 호평에도 불구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단순한 캐릭터를 연기한다. 감정에 큰 기복은 없는 듯 하다. 욕망 욕망 욕망!!! 원하는 것은 까르르 거리며 가지고야 만다. 부끄러움을 타지 않는다는 태주(아! 이름마저 욕정스럽다..)는 정말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는 듯 관계를 가지고 무고한 사람의 목을 뚫는다. 근데 그 모습이 아름답고, 순수해서 원초적이다. 마작판위의 어설픈 유혹의 눈빛보다는 상현을 탐하는 병실 위의 눈빛이 더욱 매섭다. 매섭지만 달콤하고 그래서 위험하며, 그렇기에 더욱 가지고 싶고 애가 타는 그런 욕정, 그런 욕망이다.
다음에 영화를 볼때는 김옥빈의 눈빛에 좀 더 집중해보시라. 그녀는 눈빛 만으로도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눈을 흘기는 것 만으로도 당신을 탐할 수 있다. 그 눈빛은 음험하다.

P.s. 정말 태주는 상현을 사랑했을까? 차라리 불륜 영화 따로, 뱀파이어 영화 따로 였으면 어땠을까 싶다. 더욱 음험하지 않았을까 싶다.. 꺄오!!

Cut (Cut, 2004 in )



개인적으로 옴니버스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같은 재료를 가지고 여러 쉐프들은 요리를 한다.
어떤 것은 디저트가 되어 입맛을 돋우고, 어떤 것은 당당히 메인요리가 된다.
Cut은 분명히 쓰리,몬스터(Three,extremes)에서 메인요리이다.

기묘하다. 전에 쓴 <사이보그지만 괜찮아>가 이 정도의 모습이었다면 분명 지금쯤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또 배우들의 눈빛을 얘기하자면 여기서 배우들은 눈빛을 흔들지 않는다. 누구보다 긴장되어서 팽팽히,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눈빛을 보여준다.

스토리도 스토리이지만 비주얼도 상당하다. 한마디로 강렬하다. 절대 유약하지 않다. 외강내강이다. 그래서 관객들은 쉽게 지칠 수 있지만, 뭐 어때 옴니버스 영화인데! 공기 중에 공포로 울려퍼지는 이병헌의 저음, 강혜정의 번진 화장을 한 눈은 바닥에 흘러넘치는 피보다 더욱 선명하다. 임원희의 캐릭터는 하나의 쇼가 된다. 적절한 서스펜스와 코미디, 곰곰이 다시 생각해보면 불쌍한 남자. 그래서 그의 복수 아닌 복수가 더욱 잔인하게 느껴진다.

도덕적 딜레마와 아이러니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지루하다. 그것은 그들의 선택이고, 영화를 보고 난 후 우리는 그저 한가지 질문에 답하면 된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사소한" 질문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대답을 한다.
그것은 지금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것이 아닐까 싶다.
이 영화가 진짜 무서운 이유는, 피가 많이 나와서? 도끼지을 해대니까? 강혜정의 화장? 아니다. 우리가 받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결국은 우리가 가장 두려워 하던 그 무언가였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이 때문에 메인요리가 된다. 이제 우리는 흠뻑 요리에 취하면 된다.

Mangiare, por favore!

마더 (Mother,2009)



엄마.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이지만 가장 강철같은 말이 아닐까 싶다.
모두들 그것을 금이나 다이아몬드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구석구석 녹슨 쇠철과 같다.
모든 사람들은 "엄마"를 가지고 있다.
엄마는 몸부림친다. 그것은 일견 춤사위 같아 보이지만 아니다 그냥 몸짓이다. 마치 다친 새끼 강아지를 구석구석 핥아주는 어미 개와 같은 몸짓이다. 처절하다. 많은 사람들이 끔찍한 모성이라고 말했지만 거의 모든 엄마는 그녀와 같이 행동할 것이다.우리 어머니도 그렇게 말하더라. "그럼 새낀데 어떻게 해."
예순 살 먹은 노인도 어머니 앞에서는 재롱을 부리는 애기이다.하물며 영화에서의 어눌한 아들은 엄마에게 가끔은 감당하기 힘들지만, 결국 들춰 업어야 할 존재이다. 새끼이기 때문에 그녀는 잰 걸음을 재촉하고, 불안한 눈빛으로 지독한 상황을 감내한다.

영화에서 김혜자의 눈빛이 더욱 의미있게 다가오는 것은 그녀의 눈빛은 엄마의 눈빛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미"의 눈빛이다. 눈빛으로 응시하는 것 만으로도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게다가 얼굴에 드러나는 그 세월의 깊이는 모성을 더한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엄마이지만 누구나 생각할 수 없었던 어미를 연기한다.

영화가 끝나고도 모두가 먹먹한 가슴을 부여잡을 수 있는 것은, 조금만 더 영화관의 불이 늦게 켜지기를 바라는 것은, 그녀의 춤사위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적이지도 동적이지도 않다. 단지 흔들릴 뿐. 엄마의 춤사위는 세상의 모든 아들 딸들을, 그네들의 머리 색깔, 눈 색깔에 관곙없이, 떨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영화에서 엄마는 미치도록 "아름답다"

2010년 5월 6일 목요일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I'm cyborg, but it's ok, 2006)

아! 이 영화, 개인적으로 너무 안타깝다.
우리가 박찬욱 감독에게 기대한 것은 이런 분위기도, 이런 색감도, 이런 연애 이야기도 아니었다. 허진호의 애틋함이 묻어나는 싸이보그 사랑이야기라니!!! 내가 생각하는 Miss Point는 이 부분이다.

영화는 좀 더 기묘하고 기괴하고, 한마디로 그로테스크한 사랑이야기여야만 했다.

자신을 싸이보그라 착각하는 소녀. 음... 생각만 해도 오만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빵 굽는 냄새같은 소재이다. 저렇게 MovieWeek에 Preview가 나왔을 때에만 해도 저 창백한 옆 모습이라니. 박찬욱의 임수정이라니, 가슴이 두근거려 아무것도 못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영화 뚜껑을 열었을 때의 느낌은 달콤한 크로와상 냄새가 나서 들어갔더니 싫어하는 오곡식빵이 있더라 (심지어 이 영화는 오곡식빵만큼 건강에 좋지도 않다.)는 느낌이다. 너무 산뜻하고 동화적이고 아기자기 하려는 것이다. 박찬욱에게는 "잔혹"동화가 어울린다. 잔혹 "동화"가 아니라고!! 얼마든지 그로테스크할 수 있는 소재인데, 12세 관람가를 만들어 버렸다. 심지어 PC방에서 상대편에게 욕지거리를 퍼붓는 12살들에게도 이 영화는 유치하게 느껴질게다. (혹자는 12세 관람가가 임수정의 상반신 노출-얼마나 언론에서 떠들어 댔던지, 의외로 진~한 키스장면 때문이라는 썰을 풀기도 한다.)

임수정은 "싸이보그" 소녀라기 보다 싸이보그 "소녀" 같았다. "내 사랑" (??) 강혜정이 원래 맡았던 배역인 만큼 임수정한테는 일종의 개인적인 욕심이 있었다. 근데 그녀가 "자신이 사이보그인 줄 아는 미친년"인 적은 덧없는 CG와 함께 손가락과 입에서 미사일을 쏠 때 뿐이었다. 그녀의 야윈 등이나 눈썹을 탈색하고, 틀니를 끼고, 눈물 콧물 범벅이 되서 중얼 거리면서까지 자신을 지워내던 열정은 150% 인정하지만, 조금 아쉬웠던 부분이다. 그녀는 미친년 짓을 하기엔 너무 이쁘다.
아 정지훈. 차라리 복근을 보여주며 선글라스를 끼고 숨막히는 퍼포먼스를 보여줄 때가 좋았다. 심지어 그는 적은 비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임수정에게 밀리기 까지 한다. 배역이 너무 만화 같은 느낌 (남의 특징을 취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이었지만, 어쨌든 저쨌든 간에 너무 밀린다. 심지어 조연인 오달수와 이준면에게도 밀려버리니 안쓰럽다. 연기도 잘하고 비주얼도 멋있지만, 그냥 배우라는 느낌에서는 확실히 밀리는 느낌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중간 중간 나오는 라디오 속의 내레이션이다. 금자씨도 그렇고 박찬욱 영화의 내레이션들은 묘한 매력이 있다. 특히 이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 나는 고3이 되었다. 공부를 못했으니 서울로 대학을 가야만 했던 나에겐 사람들과의 친분과 교감은 쓸모없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죽으라고 공부만 했고 외로웠다. 외로움을 이겨내려면 내 안의 철옹성을 더욱 견고히 해야만 했다. 철옹성의 벽이 높아지고 두꺼워질 수록 사람들과의 Connection은 없어졌다. 혹시라도 사람들이 다가올라치면 발톱을 세웠다. 털을 높이고 사람들을 노려봤다. 이 때 나의 귀에도 이런 소리가 들려왔던 것 같다. "..동정심 금지.."

사실 내가 이 영화를 안쓰러워하면서도 애틋해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영군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자신이 싸이보그라는 사실을 알고 (아니, 싸이보그란 사실을 무의식 중에 계속 자신에게 인식시켰겠지) 발톱을 세운다. 그것은 자칫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나처럼 자신의 철옹성을 높이며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시킨다. 미친 년이라기 보단 불쌍한 년이다. 그러나 임수정은 여기서 미친 년도 불쌍한 년도 보여주지 못한다. 그녀가 영화 속에서 좀 더 외로웠다면 후반부에 도무지 공감도 애정도 가지 않는 이야기도 너그러이 잊어줄텐데.
여러모로 아쉬운 영화다.

친절한 금자씨 (Sympathy for the lady. Vengeance,2005)

영화 속에서의 강한 여성은 은근한 매력이 있다. 총들고 외계인을 무찌르는 에일리언의 시고니위버 같은 여전사보다는 자신의 여성성을 내세워 상대를 파괴시키는 "팜므파탈 형 " 여자주인공은 꽤 매력이 넘치는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이영애.
맞다. 산소같던 여자, 그 이영애이다. 우아한 발성과 몸짓. 그녀가 박찬욱을 만났다. 2005년 가장 주목받은 기대작이었고, 특히 그녀가 한 포토그래피와 흡사한 티저포스터가 공개 되었을 때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의 "과연?"은 "과연!"이 되면서 이영애는 금자씨가 되었다.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이영애가 금자씨에 잘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여성성이다. 어디엔가 끼어 있어도 유난히 우아한 광채를 뿜어낸다. 시상식장에서 영화에서도, 한마디로 고급스럽다. 그래서 더 악마와 천사를 오가는 금자씨가 되었을 때 관객들을 흔들었다. 그것은 그녀에 대한 동정도, 그녀에 대한 에로시티즘도 그녀에 대한 일종의 팬심도 아니었다. 배우 이영애가 되는 순간이다.

사람들은 그녀가 "너나 잘하세요" 에서 소름끼쳤다고 하지만 난 그녀가 출소직 후 교도소에서의 친구를 찾아와 집에서 휴식을 취했을 때이다. "천만에.."로 시작하는 건조한 내레이션과 함께 그녀는 담배를 피우며 웃어제낀다. 쉰 소리를 낼 정도로 웃어제낀다. "악마성"의 가장 뻔한 표현이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소름끼친다. 그녀의 하얀 다리와 담배를 가늘게 움켜쥔 손가락은 악마라기엔 너무 하얗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극중에서 13년간 그녀는 이 아름다움을 복수를 위해 불태운다.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잔인할 정도로. 그 아름다움을 짓이기며 복수한다.

영화의 마지막, 일종의 의식을 행하는 그녀와 동료(!!)들. 그녀는 일그러진다. 백 선생의 목에는 아이의 가위가 박혀들어갔다. 아니 오히려 가위는 그녀의 가슴에 박힌 듯 했다. 후회도 안타까움도 아닌, 흡사 이름붙이기 어려운 일종의 형용사를 그녀는 얼굴로 표현해낸다.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슬퍼보이진 않는다. 웃는다 그러나 기뻐보이진 않는다. 이 표정, 이 모습이 이영애가 했기에 더 잘 어울리는 것은 그녀의 우아함이 뭉개지는 순간, 단순히 미추를 떠나 복수라는 잔혹한 감정에 아름다움이 뭉개졌던 순간을, 정확히 포착했기 때문이다. 박찬욱과의 영화와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복수와 속죄. 그녀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그 먹먹한 무게로 짓뭉갠다. 개운지 않다.

이영애는 완벽한 캐스팅이었다. 그러나 이영애는 불완전한 캐스팅이었다. 왜냐하면, 이영애는 자신의 기존의 이미지를 버림으로써 금자씨를 완성시켰다. 이영애가 가졌던 본연의 이미지가 "우아함, 고급스러움, 아름다움"이 아니었더라면 금자씨는 아쉬운 캐릭터가 될 뻔했다. 하지만 원래 이런 아름다운 이미지를 가지지 않은 배우가 "복수에 의해 짓뭉개지는 아름다움" 까지 복합적으로 표현했다면? 너무 큰 기대일지 모르나, 이영애가 표현한 금자씨보다 훨씬 더 농밀하고 섬세하며 한 차원 높은 단계의 인물이 탄생했을게다. 아쉽다는 소리가 아니다. 여전히 이영애의 금자씨는 마음을 흔든다. 그러나 또다른 캐스팅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에서 하는 넋두리 정도라고 이해해달라.

2010년 5월 5일 수요일

올드보이(Old boy,2003)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Two Thumbs up을 외쳐서 이제와 난 이 영화가 좋아라고 한들 단순한 취향일 뿐 어떠한 전문가적인 견해를 더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복수와 구원, 속죄와 복수의 연결고리, 오이디푸스의 신화를 가져다 쓰는 것은 절대로 쉬운 풀이가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 나는 배우의 눈빛에 대해 더 초점을 맞추고 싶다.

최민식이라는 배우는 강렬하다. 그래 맞다. 강렬하다. 그 세대의 남자 배우 트로이카라고 불리는 송강호, 설경구, 한석규 모두와도 견주어도 그 눈빛이 녹록지 않다. 가끔은 순박한 아저씨가 되어 탄광촌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꽃피는 봄이오면), 책방에서 순정소설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해피엔드) 하지만 그의 눈빛은 유난히 상처가 가득하다. 칼에 손가락을 베인 듯한 상처가 아닌, 거친 면에 쓸려 새 살이 돋아도 검푸른 흉터를 남기는 상처가 가득하다.

그런 면에서 그의 연기는 오대수와 어울린다.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던" 그 살가운 눈빛에서 감방에서의 시간을 지나오며 눈빛은 뜨거운 깊이를 더한다. 하지만 그 눈빛은 자신의 새끼를 죽인 아비 사자의 처연한 눈빛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사냥꾼을 물어뜯으려는 폭력의 눈빛이다. 그래서 영화 내내 그의 눈빛이 불편한 것은 그 누군가를 위한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눈빛이기 때문이다. 불편하고 외롭고 거칠고 고통스럽다. 그 자신도 그 고통스러운 눈빛을 견디지 못한다는 듯 복수를 갈구한다.

그러나 미도 와의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새끼 사자를 지키려는 사자의 눈빛이 더해진다. 영화의 마지막, 그의 눈빛이 그 무엇보다 처연해보이는 이유는, "그가 괴물 오대수인지 그냥 오대수인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자신을 위해서인지 아님 누군가를 위해서 폭력을 갈구하고 있는가"에 따라 눈빛이 달라보이기 때문이다.


유지태의 눈빛. 흔들린다. 맞다. 그러나 이우진은 명백하다. 그의 수트나 펜트하우스에서 보듯 그의 눈빛도 찬찬히 빗어넘긴 머리칼 까지 차갑고 분명하다. 하지만 눈빛은 흔들린다. 묘한 모순이다. 사랑하던 누나를 잃고 15년간의 긴 시간을 복수로 다짐했다. 뜨거운 이유로 차갑게 변해야만 했다. 또 영화 전반은 타고도는 그 복수를 실행하기 위해 머리 깨나 썼을 것이다. 찔러죽일까? 불태워죽일까? 아니야 물에 빠뜨려 죽여버리자. 아니다. 사실 그것은 보통 사람에서 나올 수 있는 복수의 아이템이 아니었다. 오대수를 미워하는 마음은 이우진을 괴물로 만들었다. 이야기가 있는 괴물은 마법에 걸려있는 야수처럼 소녀의 공감을 얻을 만큼 절절하다. 그리고 엘레베이터 안, 누나와의 마지막 만남을 통해 마술이 풀리는 순간 그는 왕자가 아니라 먼지가 된다. 총에 맞고 떨어져 나가는 그의 눈빛은 단순히 죽는 사람의 눈빛이 아니라 텅 비어버린 눈빛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유지태는 그 눈빛을 자연스럽게 표현해낸다. 보면 볼수록 대수보다는 우진에게 마음이 가는 이유일 것이다.


미도의 눈빛은 언저리에 있다. 무언가를 분명히 쳐다보지만 그 공간을 에둘러 떠다니는 느낌이다. 아마 인물 그 자체가 외롭게 자란 탓일 것이다. 대수와의 첫 만남에서 아무런 마음을 내보이지 않던 그 눈빛은 오히려 분명하다. 그러나 극이 흐를 수록 미도의 눈빛은 피사체를 분명히 잡는 DSLR이기 보다는 어스름이 피사체의 분위기를 잡아내는 폴라로이드가 된다. 그런 눈빛을 파장이 깊게 표현해내는 것은 중반 지하철에서의 미도의 눈빛이다. 슬픈 눈빛을 하고 있지만 기묘하게 그 눈빛은 부유하는 느낌이다. 눈가 언저리 공기 중에 잡히는 슬픔과 외로움이랄까. 더구나 "번진 마스카라가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라는 영광을 안은 강혜정답게 파르라한 그 분위기는 눈빛을 집어삼킨다. 더이상 눈빛은 눈빛이 되지 않는다. 외로워서 더 매력적인 들풀같은 눈빛을 내보인다. 화면을 장악한다. 또 엔딩장면의 눈빛은 어땠는가. 눈밭이 눈동자에 반사된다. 너무 뻔한 아름다움이다. 근데 그 눈은 속눈썹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듯, 연약하게 나풀거린다. 눈빛은 그렇게 나풀거리며 화면을 장악한다. 오대수라는 괴물을 곁에 두고 평생 살아야 할 (어떤 잡지에선가 읽었던 리뷰의 한 구절) 그녀의 이름모를 비극이 눈가에 흘러들어간다. 명불허전이다. 왜 강혜정이 충무로의 블루칩이었는지, 20살이었던 그녀의 눈빛이 요즘의 신인배우들의 백마디 말보다 얼마나 더 표현력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윤진서는 몇 장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나올때 마다 알수없는 눈빛을 던진다. 그것은 슬픔도 기쁨도 만족도 후회도 버림도 더함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눈빛이기에 더 의미있게 다가온다. 울림이 있다. 진폭도 크고 파동도 크다. 누군가는 윤진서의 연기가 정말 아니라고 하지만 (얼굴을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인데 그 어색한 연기란..) 적어도 그 얼굴, 눈빛, 동작에서 풍기는 묘한 "냄새"가 있다. 향기가 아니다. 한번 옷에 배면 쉬이 빠지지 않는 불그스름한 냄새다. 낯설지만 취하게 하는 그 묘한 냄새, 그 연기가 좋았다.

올드보이만 수십번 봤다. 하지만 볼때마다 결국 배우들의 눈빛에 취해있다.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눈빛도 하나의 연기라는 의미에서 가치있는 감상이 아닐 수 없다. 여러분들도 한번 도전해보시라~~!!

2010년 4월 25일 일요일

Han's comment (2010/4/26)

모든 시작은 어설프다.
All of the startings can't be nice.

지금까지의 한국영화 단평들은 이해하기 어려웠고,
Until now, most of korean film's short review have been difficult to understand,

한국영화를 접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I think it couldn't be such a big help to "meet" korean films.

여기 "시작"이 있다.
Here, it'll be "starting."

어설프게나마,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진심으로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Although it's not that great, hope that many people can meet the korean films in mind.

자세를 편히 하고, 이 곳의 영화관으로 떠나보자.
Relax, and get to touch with this cine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