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 25일 수요일

악마를 보았다 (I saw devil, 2010)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동네에 새로운 꼬치집이 생겼다. 그 곳에는 달콤한 맛, 매운 맛, 그리고 폭탄맛이 있었는데. 그 이름도 살벌한 폭탄맛은 "그저 맵기만 한 맛"이었다. 주변의 고등학생들은 폭탄맛에 열광했다. 왜? 그것은 일종의 호기를 부리기에 적당했으니까. 난 이걸 먹고도 물을 먹거나 눈물을 흘리지 않아. 하면서 부은 혀를 헥헥 거리며 폭탄맛을 일부러 꾸역꾸역 먹기도 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폭탄맛을 많이들 먹기는 하지만 결국 학생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달콤한 맛과 매콤한 맛을 즐겨더랬다.
이 영화, 한마디로 폭탄맛 같다.

잔인함이라는 면에서 보았을 때, 우리가 "아 이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 하는 수위가 있을게다. 나는 개인적으로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이나 <킬빌>은 참을 만했지만 (사실은 열광했지만!!) 박찬욱의 이나 <복수는 나의것>은 조금 버거웠다. 역시나 이 영화는 상영 내내 불편했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견디기 힘들 정도로 버거웠다. 특히, 극 중에서 강간을 당하거나 죽어나가는 여성들을 나의 자매나 친구들로, 그리고 나는 수현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보니, 이병헌이 연기해낸 수현은 절박하고 처절하고 냉정하고 차갑다기 보다는 당장이라도 깨져버릴 것 같은 살얼음이었다. 몇 몇 장면, 칼로 아킬레스 건을 긋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거나, 작두로 나체의 여자의 머리를 잘라내는 것, 은 마치 관객들의 말초신경을 태워버리고 말겠노라는 감독의 일종의 "변태적인", 폭탄맛스러운 소스같았다. 즉, 우리가 폭탄맛을 시도는 해보지만, 결코 좋아할 수는 없는 것처럼, 이 영화는 분명히 대중에게는 크게 어필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아니, 상영 2주차 관객이 급감한 것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매력이 있다. 마치 고어포르노물을 연상시키는 장면들이나, 특히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과 비견되는 것을 보면 감독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성공이다. 가끔씩 보여지는, 혹은 느껴지는 몇 몇 감독들에 대한 오마주는 핏빛으로 현현히 빛나고 있다.
그리고 배우들의 얘기를 빼 놓을 수가 없는데, 최민식은 한마디로 "미쳤다."
감히 <추격자>의 하정우가 같은 살인마역으로 최민식과 비교되고는 하는데, 하정우는 "살인마 역을 연기한 배우" 였다면, 최민식은 "그냥 사이코 살인마" 였다. 그의 축축하게 불타는 듯한 불쾌할 정도로 강렬한 눈빛은 아쉽게도 이병헌을 압도한다. 원래의 이병헌 캐스팅이 한석규였음을 생각하면, 차라리 그 편이 이 영화의 컨셉이었던 "대결"이라는 점에서는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다. 이처럼 최민식은 영화내내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면서, <실종>의 문성근이 보여줬던 그것에 최민식의 솜씨를 더했다. 결과물은 축축히 눅은 쿠키를 먹는 듯한, 그런데 그나마도 상해버린 그 쿠키를 꾸역꾸역 삼키는 견딜수 없을 정도의 "더러운" 연기를 보여준다.
이병헌 역시 영화내내 본인의 솜씨를 발휘한다. 진짜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느끼는지 절대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종종 눈빛에 슬쩍 비치는 그 차가운 광기는 관객들과 감독이 원하던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마치 자신도 자신을 어쩔 수 없다는 그 잔인한 핑계는 영화 엔딩에서 무너져 버린다. 악마만 남아버린 그 자리에는 얼굴이 일그러지는,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가 가까스로 견뎌내던, 그저 가시 면류관을 쓴 구원자만 남아있다.

책이었던가 영화였던가 이런 구절이 생각난다.
"괴물을 잡으러 갈 때는 그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영화 속에서 유치하게 누가 악마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악마를 본 주체가 최민식(장경철)이었는지 이병헌(김수현)이였는지, 아니면 관객이나 평론가 였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악마를 보여주고 느끼기엔 그것은 너무 일차원적으로 잔인했고, 악마의 근원에 대해서 통찰하는 과정은 너무 짧았다. 피로 물들었던 속도감 넘치는 1시간 반을, 나머지 30분의 사색으로 감추기엔 영화는 너무 색깔이 분명했다. 그래서 조금은 아쉽다.
우리는 사실 악마를 "제대로" 보진 못했다.

2010년 6월 6일 일요일

장화, 홍련 (A tales of two sisters, 2003)


쌍화점 (A Frozen flower, 2008)


아... 쩔어!! 아마도 한국영화 역사상 아직도 가장 야한 영화가 아닐까 싶다. 또 당시의 뉴스를 찾아보니 송지효가 헤어누드까지 한다는 루머가 있었던 듯 하다. 에로틱한 강렬함에 있어서는 그래도 괜찮았을 법한 영화다.
욕정이 넘실거린다. 뒤이어 육체도 넘실거린다. 마치 더이상 못 이기겠다는 듯이 서로를 감싸안는다. 비열한 손이나 눈빛이 아니다. 그저 원초적인, 서로를 가져야만 하겠다는 그런 "고픔"이다. 평생 왕의 꼳츄맛만 보던 홍림은 그녀의 버진에서 새로운 쾌락을 느꼈을지도. 어쩌면 사랑이 아니라 그저 "하고싶다"로 보였던 것은 그 이유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어설프다. 그래서 이 영화가 아쉬운 이유이다. 어설픈 사랑이느니 "난 널 죽도록 갖고싶어" 라는 애욕이 더 강렬하다. 몸 섞다 보면 마음도 섞이기 마련.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여전히 널 죽도록 갖고 싶어라는 마음이 더 크게 보여졌더라면 영화는 명불허전이 되었을텐데.
송지효는 무겁다. 눈빛도 목소리도 가라앉는다. 그래서 더 진중하다. 그녀가 그 "어설픈 사랑"에 지쳐보이는 이유는, 그녀의 애욕은 인물에 비해 가볍기 때문이다. 날이 어둡다. 자시가 되었다 보다. 옷은 벗겨지고 서로를 애무하며 몸은 반응한다. 사실 이 영화가 싫으면서도 "좋은" 이유는 이렇게 과감하다. 젠체하지 않는다. 노출도 표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쩌면 앞으로의 몇 년 후에 여배우의 노출에 관한 패러다임은 바뀔 것이다. 그저 신체부위일 따름인, 가슴에 엉덩이에 굳이 큰 의미부여를 할 필요는 없다. 대신 그 장면이, 그 흐름이 정말로 "갖고싶은-욕망" 이었는지가 중요하다.
송지효는 극 중에서 홍림을 원한다. 사랑인지 욕정인지 따지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리고 불나방 처럼 그 불에 몸을 던진다. 결국 그녀에게 남은 것은 없지만, 아마도 그녀는 이후에 잘 살았을게다. 왕후는 용감했고, 누구보다 진중했으며, 누구보다 솔직했다.
이 것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달콤한 인생 (A bittersweet life, 2005)

이 영화 고급스러운 프리미엄 와인인 척 하지만 사실은 그저 찍어낸 비루한 기획상품같다. 한국제목과는 달리 영제목이 달콤하면서 씁쓸한 인생이다. 무엇을 얘기하고 싶었던 걸까

"나한테 왜 그랬어요?" 묻는다. 사실은 자신에게 하고 싶은 질문일지도. 결국 죽음으로 다가간다. 흔들리는 나무를 보며 쓸쓸히 읊조리던 독백처럼, 사실 흔들렸던 것은 남자의 마음뿐인데.

이병헌의 눈빛은 쓸쓸하지 않다. 그러나 깊다. 깊어서 속내를 읽어낼 수 없을 만큼, 진중하고 고요하다. 그런 그의 눈빛이 흔들리는 순간은, 그의 뒷모습이 흔들리는 것은 그녀의 첼로때문이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는데, 그는 그녀의 연주를 듣는 장면이다. 눈빛은 없지만 단단히 굳어진 어깨는 그녀의 소리에 무너져버린다. 보리수가 흔들리던 그 모습처럼, 그는 흔들린다. 가벼운 흔들림이라기 보다는 아쉬운 흔들림에 가깝다.


다시 처음 얘기로 돌아가서 영화는 고급스럽다. 그런데 조금만 수가 틀리면 폐 시장에서 묶여서 물 세례를 받는다. 진흙에 파묻히고 축축한 복수심만 남는다. 젠체하지만 사실은 속은 비틀어져있다. 달콤 씁쓸하다고? 와인인 줄 알고 마셨는데 칡즙이 넘어온다. 써서 뱉고 싶지만 그저 삼키는 수밖에. 질끈 감고 그냥 버텨내면 또 흔들림이다. 유난히 화장실 거울에 비친 피를 씻어내는 남자의 눈빛이 막막한 이유는 아직도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사람들은 모두 흔들린다.
보스도, 남자도, 여자도, 심지어 백사장도...
그 미묘한 떨림은 큰 파동이 되어서 모두들 자신에게 질문한다.

"나한테 왜 그랬어요..?"

범죄의 재구성 (The big swindle, 2004)


coming soon

타짜 (The war of flower, 2006)

패가 돌아간다. 선은 정해졌다. 손은 눈보다 빠르다는 영화의 카피처럼, 영화는 쉴 새 없이 몰아친다. 그러나 관객은 지치지 않는다. 왜냐고?
최동훈이니까.

극 중 인물은 많지만 절대 과하지 않다. 고니도 정마담도 아귀도 고광렬도, 심지어 고광렬의 여자친구까지.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모두가 기억나는 이유는 영화 자체가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마치 화투패의 뒷면 처럼 자극적이고 강렬하다.

그러나 나의 포인트는 역시 정마담이다. 김혜수는 여기서 너무 아름답다. 아름다운 칼이란다. 전체를 조각해서 보석을 새겨넣은 천박한 칼이다. 그녀는 사람들을 베는 것에 익숙하다. 그런 그녀에게 동정이 가는 이유는 그녀는 쓸쓸하기 때문이다. 극도로 예민하지만, 외로운 사람이다. 명품을 걸쳐입은 그 외양은 화려해보이지만, "먹고 살기 힘들만큼" 그녀는 자신이 팍팍하다. 어쩌면 그녀가 "평경장"을 죽여서라도 정말로 갖고 싶던 것은 어떤 비루한 욕망이라기 보다, 그녀 자신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나를 이 길로 들였어." 속고 속이고, 그러나 패는 돌아가고. 손도 눈도 입도 쉴 틈이 없는, 사람들을 판떼기에 앉혀서 그 끝까지 끊어먹고야 마는, 가장 원초적이고 천박하다. 어쩌면 "이대를 다니던" 그녀는 여느 대학생들처럼 풋풋했을 지도. 그녀를 잃어버린 순간, 그녀는 가장 끔찍하게 인생 자체를 강간당했고, 되갚아준다. 되갚아 준다해도 돌아오는 것은 없다. 이미 시간이란 바퀴는 꽤 많은 것을 감았고 다시 풀기엔, 다시 자르기엔 그녀에게 너무 아까웠을지도.
외롭지만 결국 끊어내지 못하는 그녀의 눈은 처량하다. 아름다운 칼이지만 속으로는 녹슬어 있다.

패는 돌아간다. 누구는 승자가 된다. 나머지는 패자가 된다. 누구는 광박을 썼고, 누구는 피박이란다. (물론 영화에서는 섯다를 친다)
사실은 지긋지긋한 청춘도 도박판 아니던가.
"그래도" 전이 많은 사람은 게임을 계속 이어가고, 끊임없이 패는 돌아가지만, 자신을 소모한다. 대박은 오기도 하지만 쪽박도 온다. 가끔은 배짱있는 선택도, 가끔은 비열한 사람에게 당하기도. 그래도 나라면 이 도박판에서 이렇게 뻔한 답을 하겠다.
"못먹어도 고!"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Untold Scandal, 2003)


워낙에 좋아하는 영화인터라 지금도 사람들의 리뷰든지 지나간 뉴스들을 다 챙겨 본 영화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한 블로거의 리뷰, 마지막 이었다.

"조원과 숙부인은 툭-하고 떨어지면서 이승에서 저승으로 간다. 하지만 이번에 숙부인은 사랑의 징표인 자신의 빨간 목도리를 챙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는 우리가 부부라한들 - 굳이 징표가 없다 한들- 뭐라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기에.."

전에 얘기했던 것 처럼, 이 영화는 정극을 바탕으로 하고 코미디를 더했다. 에로틱한 코미디라니. 그러나 천박하지 않다. 모두들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듯 달려들지만 그것은 공격적이라기 보다 낭만적이고 우아하다. 그 몸짓 하나하나가 더 애틋하게 혹은 코믹하게 보이는 이유는 극 중의 모든 인물은 진지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것의 원작이 프랑스의 소설 피에르 쇼데를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이라는 것은 놀라울 따름이다. 살롱 문화와 규방 문화의 적절한 매치, 위험한 유혹과 탐닉이라는 주제는 한국적으로, 누구보다 더 한국적으로 얽혀든다. 그들이 숨막히는 코르셋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지치는 유혹의 게임을 벌였다면, <스캔들>은 넉넉한 한복자락 처럼 완급조절에 능하다. 유혹의 긴장감, 쾌락의 즐거움, 그에 대한 애틋한 마음까지 김대우는 능수능란하게 외국의 한 켠을 한국에 옮겨놓는다. 봉숭아 물이 끝내 새끼 손톱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숙부인의 마지막이 아직도 절절하게 남는 이유는 이 때문일지 모른다.


그리고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미술과 음악이 아닐까 싶다. 정구호와 이병우. 명불허전이다. 당시 뉴스 기사로 보면 순수제작비만 50억원, 미술에만 20~30억원만 투자되었다고 하는데 정구호는 돈에 아깝지 않은 미술을 보여준다. 사치와 향락이 가장 심했다는 19세기의 조선 말, 그 곳은 여느 살롱보다 더욱 우아하고 기품이 있다. 그녀의 비녀, 화장품, 향수 그리고 문지방 하나까지도 아름다우니 굳이 명소(내소사)까지 가지 않더라도 장면은 하나의 화폭이 된다. 화폭이 되어서 가슴까지 저려오는 아름다움이 흘러넘친다.
이병우 역시 음악으로 영화 전체를 조율한다. 바로크 시대를 연상하게 하는 음악을 하고 싶다던데, 우리가 많이 착각하는 부분-우리의 것이 가장 한국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과감하게 뛰어넘은 점이 좋다. 한마디로 모던하다. 아니 ko-dern하다. (Korean-modernism) 과감하지만 과하지 않고, 애틋하지만 슬프진 않다. 딱 한국적인 느낌이다.

영화는 비극적이다. 아름다운 비극이다. 결국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떠난다. 하지만 마음은 그 곳에 두고 간다. 그것이 설령 위험한 게임에서 비롯한 마음이었는지, 단순히 사회에 갇혀서 조그만 일탈이었을 지라도. 그들의 마음은 그림이 되어, 빨간 목도리가 되어, 그리고 꽃잎이 되어 슬픔 속에 떠다닌다. 영화의 마지막 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그런" 낭만스러운 슬픔이 아닐 수 없다.